퇴로 문중

여주이씨 퇴로 문중 이야기

여주이씨 25세 자유헌공 (휘 만백)의 6대손 도원공 (휘 종극)의 세아들 항재공(휘 익구), 정존헌공( 휘 능구), 용재공(휘 명구)가 밀양의 단장면 무릉리에서 1890년에 부북면 퇴로리로 이거하면서 여주이씨 자유헌공파의 퇴로마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주이씨 자유헌공파 3대소가는  퇴로마을에서  가옥을 짓고 전답을 경영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이씨 문중은  유학적 가르침에 따라 인과 예를  일상에 구현하고자  스스로를  경계하고 배움에 정진하고 자녀들을 훈육하고 선조들의 얼을 기렸을 뿐아나리 겨레와 나라를 염려함으로 사업을 도모하고 밀양지역의  향리 지도층으로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감당하였다.

개화기에서 일제 해방과 건국에 이르기까지 국운 회복을 위한 애씀

퇴로의 이씨 삼대소가는 조선말에서 근대의 격동기에 보수의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시대를 선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와 애민애족의 길을 걸었다. 

1 화산의숙(1907~1910), 정진학교(1921~1937), 명륜학원(1949) 등의 민족교육과 신지식 교육을 위한 육영사업 주도, 

2 활자 인쇄소(이엽산방)와 출판사 (동문사)를 통한 출판문화사업(성호문집, 독사차기, 출판), 

3 구휼를 위한 이창 설치, 주민자치와 상부상조를 위한 퇴로동약의 시행, 민족의 토지를 지키기 위한 밀양식산조합 설립, 농민 계몽을 위한 노동야학소 및 노동저축조합 설립, 국채보상운동 참여 등 사회 운동 및 애국계몽 운동

4 양잠사업(이가잠종제조소, 육일염직소)진출, 저수지 양어장 운영, 유통업(퇴로상회), 술도가, 정미소, 각종 물품제조공장 운영 등을 통한 일종의 물산장려운동의 실천, 

5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 (시곡공 이주형) 배출 등을 통한 정치 참여

이씨문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한 촌락의 발전을 넘어 우리 민족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확립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참여는 전통적 유교의 가치관에 기반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읽고 신문물을 주체적으로 흡수하는 유연성을 발휘한 덕분이다. 이 배경에는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성재 허전의 가르침을 계승한 여주이씨 퇴로 문중의 “신구병진”의 철학적 지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