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공은 퇴로마을 소재 정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공의 부친 도학공과 재종숙부 퇴수재공을 비롯한 공의 문중에서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주관하였기 때문이며 소은공 자신도 공동 설립자로, 서무로,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위치한 정진초등학교 자리는 현재 임실치즈스쿨이 차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제헌국회의원, 문교부 장관, 농림부 장관 등을 배출한 소규모 명문 초등학교 이었다.
1897년 여주이씨 퇴로 문중 3대소가의 맏형인 항재 이익구 선생이 '화산의숙'이란 이름으로 처음 신식학교 문을 열어 집안 자제들을 교육했으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1921년에 여주이씨 대소가의 율봉 이병원, 도하 이병규, 퇴수재 이병곤 선생 등이 화산의숙을 복구하여 '정진의숙'이란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어 윤리 도덕, 애국정신, 신지식 함양에 힘을 쏟게 된다. 1922년 정진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민족교육에 힘쓰다가 단군기원의 사용, 배일교육, 애국사상의 고취가 문제되어 모든 교원들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구금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 1939년 4월에는 강제로 폐교되고 만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화양국민학교로 다시 문을 열어 공립학교로 운영 되고, 1960년 4월부터 본래 이름을 되살려 '정진국민학교'로 바뀌었다. 1975년에 동문회에서 뜻을 모아 교정에 '정진의숙 창학 기념비'를 세웠으나, 이후 학생수 급감으로 1996년부터 부북국민학교 정진분교로 운영되다 1998년 8월 31일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 유서깊은 배움터에 우리들의 역사를 적는다. 항재 이익구 선생이 화산의숙을 창설한 것이 1890년대 였는데 선생은 허성재의 문하에서 물려받은 성호학파의 실학사상을 이 고장에 심는 한편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젊은이들에게 새지식과 기술을 가르쳤다. 나라가 남에게 빼앗기자 외국인을 내어보내고 학당의 문을 닫았다가 삼일운동을 치르고난 1920년에 이병원, 이병규, 이병곤 선생 여러 어른은 화산의숙을 복구하여 학도 들을 모집하면서 명칭을 정진의숙으로 고쳤다. 화산의숙 때에는 서고정사, 용현정사 등의 집을 빌려 사용했으나 정진의숙은 지금 자리에 넓은 땅과 아담한 교사를 가졌다. 그리고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위양. 대항.월산 등 인근 6동 주민의 생활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법령에 따라 의숙을 학교로 개칭하고 국민학교 과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면서 기본정신은 오직 겨레의 새싹을 키우는 데에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교 조치를 당했다가 8.15해방 후에 공립학교로 인가되었으며 화양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어졌으나 창학의 이념을 살리기 위해 正進의 두 글자를 다시 회복하였다. 옛 일을 일깨워 앞날의 창조에 밑거름이 되게 함이다. 이번에 경향 각지에서 활약하는 많은 동창들이 힘을 모아 창학기념비를 세우면서 특별히 정진의숙을 표방한 것은 위로 ‘화산의숙’ 을 잇고 아래로 정진학교로 뻗어 나온 결절점이 되기 때문이다.
아아 그날의 높은 뜻, 이 돌과 함께 영원무궁하리라.
단기 4308년(서기 1975년) 3월 3일
정진동문회 회장 철학박사 안호상 지음
연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이가원 씀